콘서트 여는 '하숙생', 가수 최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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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스타앤스타작성일04-03-16 22:08 조회92,38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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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숙생.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 길 잃은 철새. 진고개 신사. 맨발의 청춘. 팔도강산. 빛과 그림자…
구수한 음색으로 중.장년층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온 최희준(崔喜準.68)씨가 오랜 외도를 끝내고 가수로서의 만년 청춘을 꽃피우기 위해 요즘 목소리 조율에 한창이다.
칠순을 앞둔 인생의 황혼기에 정성스레 목청을 닦고 가다듬고 있는 이 노신사에게선 그래선지 이번 공연 무대에 대한 각별한 기대와 설렘이 인터뷰 도중 언뜻언뜻 느껴졌다.
\"지금까지 한번도 가수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45년 가까이 노래를 했는데 제가 뭘 한들 가수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겁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마음 편하게 노래할 참입니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습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가수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려 합니다. 지방공연도 준비하고 있고 미국공연도 추진중입니다. 미 공연은 성사여부가 확실하지 않아 구체적으로 말하기 곤란합니다만 성사되면 5월에 할 계획이죠.\"
올해가 데뷔 45년째입니까?
\"미8군 무대에서 직업가수로 노래를 시작한 게 1959년이었죠.
그렇게 따지면 올해가 데뷔 45주년이 됩니다. 첫 노래인 `우리애인은 올드미스\'를 1960년에 취입했고, 61년부터 이 노래로 유명세를 탔어요. 노래취입을 기준으로 보면 내년이 45년째입니다. 그러나 햇수가 뭐 그리 중요합니까?\"
데뷔 당시 인재들의 산실인 서울법대에 다니고 있었으니 `서울법대 가수\'인 그에게 쏠린 세간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이곳 대학로, 옛 서울대 문리과대학 교정에서 제1회 장기노래대회가 열렸어요. 가야금 명인인 황병기 선생과 제가 법대 대표로 나갔죠. 그때부터 `법대 친구 노래 잘하더라\'란 소문이 나기 시작했어요. 그 뒤 미8군 무대에 나갔고,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를 취입해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겁니다.\"
노래를 잘 하셨군요?
\"고등학교 때부터 노래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공부했을 정도죠. 그러다 좋아하는 일에 한 번 발을 들여놓은 뒤부터 자꾸 빨려 들어갔고, 가수로 유명세를 타고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었던 겁니다. 집안문제가 걱정이었으나 제가 좋아하는 일이니 막을 방법이 없었죠.\"
반대가 심했다는 뜻인가요?
\"저는 처음에 상과(商科)를 지원하려 했어요. 그러나 아버님이 `네가 성적이 안되면 몰라도 성적이 되는데 왜 그러느냐. 고시패스해서 판검사해야지\'라고 말씀하시면서 직접 서울법대 원서를 사오셨어요.\"
응시하기도 했습니까?
\"대학 3학년 때인 1957년 제8회 고등고시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응시했죠. 그러나 `이건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이구나. 시간낭비 말고 관두자\'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죠.\"
미쳐 졸업에 지장은 없었나요?
\"1958년 졸업했어야 하는데 1년 휴학하고 이듬해 졸업했어요. `국제법\'에 관한 졸업논문은 제출시간이 다가오고 마음이 급해 공연 다니면서 기다리는 시간에 분장실에서 썼어요. 그러니 영 불량학생이었다고 봐야죠.\"
법대출신 가수가 또 있나요?
\"저같은 미친 놈이 또 나오겠어요? 법대를 졸업한 덕분에 가수로서의 색깔을 입히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법대 졸업생 중에 법대의 은혜를 가장 많이 입었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법대에 미안한 마음이 많아요.\"
아버님의 상심이 크셨겠군요?
\"당시 대한일보 문화면에 `대기만성형 학사가수 최희준\'이란 제목으로 대문짝만한 기사가 실렸어요. `그게 너지\'하고 아버님이 물으시길래 `예\'했더니 그 뒤로 아예 말씀을 안하시더군요. 아버님께 큰 마음의 상처를 드린 겁니다.\"
`아버님\' 얘기를 하던 중 안경 너머 눈가로 자꾸 손이 갔지만 그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눈이 고장나서…안구건조증이란다\"고 다른 이유를 둘러댔다.
감미로운 저음이 트레이드 마크인 그는 비결이 뭐냐는 물음에 \"목소리가 좋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고 특별한 비결도 없다\"면서 \"원래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수가 아니라 가슴으로 노래하는 가수\"라고 답했다.
그래도 목소리에 얽힌 얘기가 많죠?
\"흑인가수 냇킹콜을 모창하던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시절 미국사람들이 저를 보고 비단 목소리란 뜻의 `벨벳 보이스\'라고 하더군요. 그 당시에는 별 신경 안쓰고 그냥 듣고 넘겼어요.\"
`한국의 냇킹콜\'이란 별명은 데뷔초기 모창에 기인하나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그의 노래가 좋아서 그대로 흉내내고 그랬죠.
그 사람 흉내는 내려고 해도 쉽게 안됐어요. 흑인임에도 발음이 정확했죠. 1964년 우리나라에서 공연을 마치고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담배를 엄청 피우더라고요. 그의 공연을 당시 시민회관인 세종문화회관에서 실제 보고나니까 노래하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지더군요. `내가 무슨 한국의 냇킹콜이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한국의 냇킹콜\'이라고 저를 소개했더니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더군요.\"
데뷔곡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발발한 해에 큰 인기를 끌었는데 당시 사회분위기가 어땠나요?
\"쿠데타 터지고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가 부쩍 더 히트를 쳤어요.
GI(미국 징모병, 사병의 속칭)문화가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때여서 `올드미스\'란 노래제목이 크게 어필했던 것 같아요. 한명숙의 `노란샤스의 사나이\'도 그랬어요. 당시 한명숙씨가 온통 (나라를) 노란물을 들였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까요. 되돌아보면 그때는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될 때였어요. 그 때문인지 활기차고 희망적인 노래가 많았습니다. 그런 것들이 한강의 기적의 원동력 아니었을까요? 제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보면 그래요.
1963년 `진고개 신사\'는 첫 상업방송인 MBC라디오 개국특집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인기를 끌었고, 이듬해 `맨발의 청춘\'은 청년문화에 불을 지른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가 히트한 덕이죠. `하숙생\'도 KBS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였어요.\"
`희준\'(喜準)이란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나요?
\"제 원래 이름은 성준(成俊)이었습니다. 남산 KBS라디오 방송국에 처음 방송하러 갔는데 `성준\'이란 이름이 그대로 나가면 아버님이 듣고 놀랄 것이 걱정이 됐어요.
당시 아버님은 몸이 편찮으셔서 자리에 누워 매일 라디오를 들어셨어요. 당시 KBS악단장 김인배씨, 음악 PD 송영수씨, 지휘자 김강섭씨 등과 의논한 끝에 `희준\'으로 하자고 뜻을 모았고 작사작곡가 손석우 선생이 `喜準\'이란 한자를 붙였어요. `희준\'이 처음엔 예명이었지만 1995년 개명절차를 마쳐 이젠 본명입니다.\"
그렇게 이름이 바뀐 최희준은 1960년대 초.중반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로 시작되는 `하숙생\'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가요무대 독주시대\'를 구가했다.
숱한 히트곡 중에서도 `하숙생\'을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은 그는 \"사람들은 저를 `하숙생\'으로 생각한다. 노랫말도 간단하지만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철학적, 종교적 의미도 담겨 있는 노래다. 그런 점에서 저에겐 참 고마운 노래\"라고 말했다.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 가수들 모임인 노래 동아리 `포클로버스\' 리더로 활동하기도 한 그다.
\"유주용.박형준.위키리 이한필과 함께 4인조 동아리를 만들어 합창을 해보려 했으나 각자 개성이 강하고 음색이 너무 달라 잘 안됐어요. 그러나 서로 뜻이 맞는 열혈 청년들이어서 같이 술 마시고, 인생을 논하고, 노래 이외의 일로 대단했죠.\"
가요인생을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세요?
\"`우리 애인은…\'부터 `진고개 신사\'까지 초창기를 냇킹콜 모창시대라고 한다면, `맨발의 청춘\'에서 `팔도강산\'까지를 제 색깔을 찾기 위한 모색의 시대요.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제 색깔을 찾은 시대라고 나름대로 분류해 볼 수 있겠군요.
되돌아보면 저는 운이 좋은 가수였어요. 제가 천주교 신자인데 하느님께서 저를 참 사랑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노래할 수 있도록 여건이 갖춰졌어요.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도, 자연스럽게 정치인의 삶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도, 또 요즘 자연스럽게 노래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래요. 제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저한테 기대치가 있을 테니 어긋나지 않게 살아가고 싶어요. 저를 지키며 열심히 깨끗하게 살아가는 것이 제 도리라고 봅니다.\"
예전과 비교해볼 때 요즘 국내 가요계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세요?
\"요즘 안타까운 것은 음반시장이 활기를 띠지 못하고 내리막 길을 달린다는 것입니다. 해적판 음반, MP3 파일의 다운로드 등 제작자들의 제작의욕을 꺾는 일들이 많아요. 가요시장이 전환기에 접어든 것 같아요. 그러나 예전에는 제약이 많았던 반면 요즘에는 소재의 제한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게 큰 차이라고 할 수 있겠죠.\"
1996년 가수로는 처음으로 15대 국회의원(안양.동안갑)에 당선돼 정치인으로 변신했던 그는 \"국민의 힘, 투표의 힘으로 수평적,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야 겠다는 일념에서 국민회의 창당발기인으로 정계에 입문했다\"면서 \"그러나 4년 뒤 지역구 통합으로 공천탈락 후 `여기까지가 의원으로서 역할을 다하는 시점\'이라고 마음을 정리하고 정계에서 발을 뺀 것\"이라며 후회가 없다고 했다.
\"금배지를 달았을 때가 환갑이었어요. 환갑의 초선의원으로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꼭 가수가 아니라도 대중예술계에서 저처럼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의정활동을 하는 게 좋다는 판단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에 대해 그는 \"참 안됐다. 해법이 간단할 것 같은데 어렵게 꼬였다\"고 안타까움을 내비친 뒤 \"국가적 어려움이 안정 속에 슬기롭게 해결될 것으로 믿는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구수한 음색으로 중.장년층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온 최희준(崔喜準.68)씨가 오랜 외도를 끝내고 가수로서의 만년 청춘을 꽃피우기 위해 요즘 목소리 조율에 한창이다.
칠순을 앞둔 인생의 황혼기에 정성스레 목청을 닦고 가다듬고 있는 이 노신사에게선 그래선지 이번 공연 무대에 대한 각별한 기대와 설렘이 인터뷰 도중 언뜻언뜻 느껴졌다.
\"지금까지 한번도 가수가 아니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45년 가까이 노래를 했는데 제가 뭘 한들 가수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겁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마음 편하게 노래할 참입니다.\"
앞으로 계획은 어떻습니까?
\"이제 본격적으로 가수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려 합니다. 지방공연도 준비하고 있고 미국공연도 추진중입니다. 미 공연은 성사여부가 확실하지 않아 구체적으로 말하기 곤란합니다만 성사되면 5월에 할 계획이죠.\"
올해가 데뷔 45년째입니까?
\"미8군 무대에서 직업가수로 노래를 시작한 게 1959년이었죠.
그렇게 따지면 올해가 데뷔 45주년이 됩니다. 첫 노래인 `우리애인은 올드미스\'를 1960년에 취입했고, 61년부터 이 노래로 유명세를 탔어요. 노래취입을 기준으로 보면 내년이 45년째입니다. 그러나 햇수가 뭐 그리 중요합니까?\"
데뷔 당시 인재들의 산실인 서울법대에 다니고 있었으니 `서울법대 가수\'인 그에게 쏠린 세간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이곳 대학로, 옛 서울대 문리과대학 교정에서 제1회 장기노래대회가 열렸어요. 가야금 명인인 황병기 선생과 제가 법대 대표로 나갔죠. 그때부터 `법대 친구 노래 잘하더라\'란 소문이 나기 시작했어요. 그 뒤 미8군 무대에 나갔고,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를 취입해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던 겁니다.\"
노래를 잘 하셨군요?
\"고등학교 때부터 노래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라디오를 들으면서 공부했을 정도죠. 그러다 좋아하는 일에 한 번 발을 들여놓은 뒤부터 자꾸 빨려 들어갔고, 가수로 유명세를 타고는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었던 겁니다. 집안문제가 걱정이었으나 제가 좋아하는 일이니 막을 방법이 없었죠.\"
반대가 심했다는 뜻인가요?
\"저는 처음에 상과(商科)를 지원하려 했어요. 그러나 아버님이 `네가 성적이 안되면 몰라도 성적이 되는데 왜 그러느냐. 고시패스해서 판검사해야지\'라고 말씀하시면서 직접 서울법대 원서를 사오셨어요.\"
응시하기도 했습니까?
\"대학 3학년 때인 1957년 제8회 고등고시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응시했죠. 그러나 `이건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이구나. 시간낭비 말고 관두자\'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죠.\"
미쳐 졸업에 지장은 없었나요?
\"1958년 졸업했어야 하는데 1년 휴학하고 이듬해 졸업했어요. `국제법\'에 관한 졸업논문은 제출시간이 다가오고 마음이 급해 공연 다니면서 기다리는 시간에 분장실에서 썼어요. 그러니 영 불량학생이었다고 봐야죠.\"
법대출신 가수가 또 있나요?
\"저같은 미친 놈이 또 나오겠어요? 법대를 졸업한 덕분에 가수로서의 색깔을 입히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법대 졸업생 중에 법대의 은혜를 가장 많이 입었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법대에 미안한 마음이 많아요.\"
아버님의 상심이 크셨겠군요?
\"당시 대한일보 문화면에 `대기만성형 학사가수 최희준\'이란 제목으로 대문짝만한 기사가 실렸어요. `그게 너지\'하고 아버님이 물으시길래 `예\'했더니 그 뒤로 아예 말씀을 안하시더군요. 아버님께 큰 마음의 상처를 드린 겁니다.\"
`아버님\' 얘기를 하던 중 안경 너머 눈가로 자꾸 손이 갔지만 그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눈이 고장나서…안구건조증이란다\"고 다른 이유를 둘러댔다.
감미로운 저음이 트레이드 마크인 그는 비결이 뭐냐는 물음에 \"목소리가 좋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고 특별한 비결도 없다\"면서 \"원래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수가 아니라 가슴으로 노래하는 가수\"라고 답했다.
그래도 목소리에 얽힌 얘기가 많죠?
\"흑인가수 냇킹콜을 모창하던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시절 미국사람들이 저를 보고 비단 목소리란 뜻의 `벨벳 보이스\'라고 하더군요. 그 당시에는 별 신경 안쓰고 그냥 듣고 넘겼어요.\"
`한국의 냇킹콜\'이란 별명은 데뷔초기 모창에 기인하나요?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그의 노래가 좋아서 그대로 흉내내고 그랬죠.
그 사람 흉내는 내려고 해도 쉽게 안됐어요. 흑인임에도 발음이 정확했죠. 1964년 우리나라에서 공연을 마치고 돌아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젊은 나이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담배를 엄청 피우더라고요. 그의 공연을 당시 시민회관인 세종문화회관에서 실제 보고나니까 노래하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지더군요. `내가 무슨 한국의 냇킹콜이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한국의 냇킹콜\'이라고 저를 소개했더니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보더군요.\"
데뷔곡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발발한 해에 큰 인기를 끌었는데 당시 사회분위기가 어땠나요?
\"쿠데타 터지고 `우리 애인은 올드미스\'가 부쩍 더 히트를 쳤어요.
GI(미국 징모병, 사병의 속칭)문화가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치고 있던 때여서 `올드미스\'란 노래제목이 크게 어필했던 것 같아요. 한명숙의 `노란샤스의 사나이\'도 그랬어요. 당시 한명숙씨가 온통 (나라를) 노란물을 들였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으니까요. 되돌아보면 그때는 국민소득이 100달러도 안될 때였어요. 그 때문인지 활기차고 희망적인 노래가 많았습니다. 그런 것들이 한강의 기적의 원동력 아니었을까요? 제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보면 그래요.
1963년 `진고개 신사\'는 첫 상업방송인 MBC라디오 개국특집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인기를 끌었고, 이듬해 `맨발의 청춘\'은 청년문화에 불을 지른 신성일.엄앵란 주연의 영화가 히트한 덕이죠. `하숙생\'도 KBS라디오 드라마 주제가였어요.\"
`희준\'(喜準)이란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나요?
\"제 원래 이름은 성준(成俊)이었습니다. 남산 KBS라디오 방송국에 처음 방송하러 갔는데 `성준\'이란 이름이 그대로 나가면 아버님이 듣고 놀랄 것이 걱정이 됐어요.
당시 아버님은 몸이 편찮으셔서 자리에 누워 매일 라디오를 들어셨어요. 당시 KBS악단장 김인배씨, 음악 PD 송영수씨, 지휘자 김강섭씨 등과 의논한 끝에 `희준\'으로 하자고 뜻을 모았고 작사작곡가 손석우 선생이 `喜準\'이란 한자를 붙였어요. `희준\'이 처음엔 예명이었지만 1995년 개명절차를 마쳐 이젠 본명입니다.\"
그렇게 이름이 바뀐 최희준은 1960년대 초.중반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로 시작되는 `하숙생\'의 인기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가요무대 독주시대\'를 구가했다.
숱한 히트곡 중에서도 `하숙생\'을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은 그는 \"사람들은 저를 `하숙생\'으로 생각한다. 노랫말도 간단하지만 `인생은 이렇게 살아야 된다\'는 철학적, 종교적 의미도 담겨 있는 노래다. 그런 점에서 저에겐 참 고마운 노래\"라고 말했다.
명문대 출신의 엘리트 가수들 모임인 노래 동아리 `포클로버스\' 리더로 활동하기도 한 그다.
\"유주용.박형준.위키리 이한필과 함께 4인조 동아리를 만들어 합창을 해보려 했으나 각자 개성이 강하고 음색이 너무 달라 잘 안됐어요. 그러나 서로 뜻이 맞는 열혈 청년들이어서 같이 술 마시고, 인생을 논하고, 노래 이외의 일로 대단했죠.\"
가요인생을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세요?
\"`우리 애인은…\'부터 `진고개 신사\'까지 초창기를 냇킹콜 모창시대라고 한다면, `맨발의 청춘\'에서 `팔도강산\'까지를 제 색깔을 찾기 위한 모색의 시대요.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제 색깔을 찾은 시대라고 나름대로 분류해 볼 수 있겠군요.
되돌아보면 저는 운이 좋은 가수였어요. 제가 천주교 신자인데 하느님께서 저를 참 사랑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잘 노래할 수 있도록 여건이 갖춰졌어요.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았던 것도, 자연스럽게 정치인의 삶을 정리할 수 있었던 것도, 또 요즘 자연스럽게 노래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래요. 제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저한테 기대치가 있을 테니 어긋나지 않게 살아가고 싶어요. 저를 지키며 열심히 깨끗하게 살아가는 것이 제 도리라고 봅니다.\"
예전과 비교해볼 때 요즘 국내 가요계는 어떤 차이가 있다고 보세요?
\"요즘 안타까운 것은 음반시장이 활기를 띠지 못하고 내리막 길을 달린다는 것입니다. 해적판 음반, MP3 파일의 다운로드 등 제작자들의 제작의욕을 꺾는 일들이 많아요. 가요시장이 전환기에 접어든 것 같아요. 그러나 예전에는 제약이 많았던 반면 요즘에는 소재의 제한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게 큰 차이라고 할 수 있겠죠.\"
1996년 가수로는 처음으로 15대 국회의원(안양.동안갑)에 당선돼 정치인으로 변신했던 그는 \"국민의 힘, 투표의 힘으로 수평적,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뤄야 겠다는 일념에서 국민회의 창당발기인으로 정계에 입문했다\"면서 \"그러나 4년 뒤 지역구 통합으로 공천탈락 후 `여기까지가 의원으로서 역할을 다하는 시점\'이라고 마음을 정리하고 정계에서 발을 뺀 것\"이라며 후회가 없다고 했다.
\"금배지를 달았을 때가 환갑이었어요. 환갑의 초선의원으로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꼭 가수가 아니라도 대중예술계에서 저처럼 현장에 있었던 사람이 의정활동을 하는 게 좋다는 판단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에 대해 그는 \"참 안됐다. 해법이 간단할 것 같은데 어렵게 꼬였다\"고 안타까움을 내비친 뒤 \"국가적 어려움이 안정 속에 슬기롭게 해결될 것으로 믿는다\"는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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